[펌]백래시​(Back-Lash)와 페미니즘의 퇴행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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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반동의 조류

요즘의 세태는 ‘페미니즘 르네상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만큼 반대편에서의 ‘반동적인 조류’도 만만치 않게 일고 있다. 특히 메갈리아·워마드의 등장 이후 페미니즘이라는 사상 자체에 대한 젊은 남성들의 반감이 격화되어 일각에서는 ‘페미니즘은 정신병’, ‘페미니즘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자리 잡을 정도이다. 나아가 이들은 넷상의 페미니스트에 대해 ‘쿵쾅쿵쾅’ ‘메퇘지’ 등의 경멸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도서시장과 아이돌·공연시장과 달리 남성 소비자가 강세를 보이는 게임·서브컬쳐 시장에서는 이러한 반감이 불매운동으로 나타났다. 특히 메갈리아를 옹호하거나 해당 밈1을 사용하는 창작자들은 가차 없이 보이콧을 당했다. 게임 <클로저스>의 한 성우가 2016년 여름 당시 메갈리아 논란으로 인해 작품에서 하차한 바 있고 당시 메갈리아를 변호한 웹툰작가들 또한 지금까지 남초 커뮤니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반대로 메갈리아 옹호 성향으로 알려진 일러스트 작가를 빠르게 교체한 <소녀전선>, <소울워커> 등은 남성 게이머 사이에서 호평을 받으며 흥행가도를 달렸다. 수도권 대학가에서도 페미니즘 인사를 둘러싼 논란이 격화되었다. 지난 5월 서강대에서 총학생회 주최의 은하선 강연이 예정되었다가 해당 강사의 남성혐오 발언 논란2과 종교적 상징물 조롱 논란을 문제 삼은 학생들의 격렬한 반발로 인해 취소되었다. 뒤이어 연세대 총여학생회가 은하선 초청 강연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학생을 주축으로 총여학생회를 학생인권위원회로 개편하자는 취지의 학생 총투표안이 통과되었다.

II. 백래시를 성찰하지 않는 진보

이러한 격화되는 ‘반동(reaction)’에 주목하는 진보진영과 여성계는 최근 ‘백래시(back-lash)’라는 신조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는 종교계와 미디어의 반(反)페미니즘 여론전을 고발한 저서 『백래시』(1991년 미국서 최초 출간)3가 국내에서 번역된 사정과 무관치 않다. 한편 전세계적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조류 속에서 권력과 자본 그리고 미디어의 전방위적 후원에 힘입은 보수우파적 백래시(진보적 시민운동과 사상 일체에 대한 공세)와 최근 젊은 남성과 일부 여성 사이에서 일고 있는 자생적인 반페미니즘 여론(이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으며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다)의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여기서의 백래시란 상황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새롭게 분석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욕설이나 비난을 위한 상투어로 사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한겨레 21>에 실린 박수진 기자의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미국의 80년대에 이뤄진 백래시와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하며, 기사 말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렇다면 반격의 수뇌부는 누굴까.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 진보정권을 이끄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각종 ‘여성혐오’적 글쓰기로 사임 압력을 받아온 탁현민 행정관이 제자리를 지키는 등 현 정부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을 허용하는 ‘암묵적’ 메시지를 준다는 것이다.”4

위와 같이 진보정권(?)이 반페미니즘의 흐름을 사실상 후원하고 있다는 황당한 진단은 과거 미국의 백래시가 “신보수주의 정치가들과 근본주의 성직자들”의 후원을 받았다는 (바로 앞의) 기사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결국 백래시라는 개념과 무관하게 페미니즘 의제를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현재의 정권에 대한 ‘비난’이 기사가 말하고 싶은 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내용 없는 신조어를 남발하는 관행은 언론뿐만 아니라 지식인 사회 사이에 만연해 있다. 한편 백래시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과거와 달리 ‘신보수주의 정치가들과 근본주의 성직자들’에 대한 호감이 전혀 없는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의 특수성을 주목하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일각에서 유행하는 백래시라는 개념은 사실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사회적 반동이라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반동의 적극적인 정치세력화의 경우는 ‘반혁명(anti-revolution)’ 혹은 ‘대항혁명(counter-revolution)’이라 불린 바 있다. 한편 여기서 되짚어야 할 점은 과거 지식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진보세력이 실패한 결과로 성찰했다는 것이다. 1차 대전 전후 독일에서 시도된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는 결국 파시즘의 도래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는데 그것을 안타까워한 발터 벤야민5은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특히 과거 ‘현대사상’이라는 표제 아래 유행했던 각종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사상(그람시, 알튀세르,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등)은 모두 벤야민의 문제의식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기본 동기는 사회변화를 좌절시킨 반동의 원인을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찾는 것이었고 이는 때로는 격렬한 진영 내 논쟁을 낳았다. 이처럼 사회변화의 실천적·이론적 노선에 대한 공개논쟁은 본래 고전적인 좌파의 미덕이었다.

반면 오늘날의 진보진영, 그 중에서도 특히 지식인들은 자신들 내부의 오류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꺼리고 승리주의적인 자평과 외부로의 책임 떠넘기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특히 페미니즘 진영의 발언과 실천의 오류에 관해서는 더욱 그 정도가 심한데, 가히 지식인들의 ‘친목질’이라고 불릴만한 행태가 대중 일부의 눈에서조차 꼴불견으로 비춰질 정도이다. 나는 이하에서 이것을 진보 지식인들의 ‘반지성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다만 페미니즘 내부에서 드물게 자기 진영 내부의 오류에 대한 자성이 제기된 사례가 (비록 국외의 사례이긴 하지만) 없지는 않다. 국내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흑인 페미니스트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인 ‘벨 훅스’는 당시 그가 목도한 여성운동의 한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페미니즘 반란은 성공했지만 혁명이 더 진척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내부적으로 혁명의 진행이 늦어지는 이유는 페미니즘 운동가들에게 있다. 이들은 페미니즘 운동이 모든 남성과 여성의 진보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진보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며, 지배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와 다른 의견이나 사고에 위협을 느끼고 반대 목소리를 금지하고 침묵시키며, 해방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데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적인 페미니즘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기를 거부하고 그 한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한편 외부적으로는 조직화된 반페미니즘적 활동으로 인해, 그리고 입장을 정하려면 알아야 할 이슈에 대한 양립된 입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남녀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해 페미니즘 운동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6

이 구절은 현재에도 페미니즘 내외부적으로 닥친 도전을 응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벨 훅스는 “반페미니즘적 활동” 등의 백래시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하지만 동시에 그 못지않게 페미니즘의 내부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공개적인 토론이 아니라 반대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것을 더 큰 미덕으로 여기는 관행에 대한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 주목할 만한 언급은 “반란은 성공했지만 혁명이 더 진척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대목이다. 벨 훅스는 페미니즘 운동이 남녀대립과 갈등을 확산시키며 대중적 유명세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이것이 사회의 보편적인 해방적 잠재력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이것은 이 지면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의문이기도 하다.

III. 메갈리아에 대한 미화와 그 결과들

앞서 보았듯이 과거 진보 지식인들에게 있어 반동 내지는 반혁명은 개혁세력 혹은 혁명세력의 실천적·이론적 오류에서 기인한 것으로 성찰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교훈은 거의 잊혔고 같은 성향의 지식인끼리 서로를 외부의 유해한 논쟁에서 보호하며 위무하는 것이 새로운 조류가 되었다. 이것을 진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또 다른 퇴행이라고 불러야 할까. 필자는 후자에 판돈을 걸고자 한다. 나아가 페미니즘에 대한 이른바 ‘백래시’는 페미니즘 내부의 오류는 물론 이를 엄호한 진보진영 전체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미니즘과 진보진영이 최근까지 저지른 최악의 오류는 바로 ‘메갈리아’ 논쟁 당시의 입장에서 잘 드러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메갈리아가 내세운 미러링이라는 허구의 명분을 문화적 영향력은 물론 정당과 사회단체 내에서의 정치적 지분을 ‘총동원’해서 옹호한 결과, 젠더이슈는 돌이킬 수 없는 남녀대결 문제로 비화되었다. 특히 일부 계층에서는 페미니즘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일말의 환상조차 사라지게 되는 등 여론은 완전히 양극화되었다. 물론 확실한 충성고객을 획득하겠다는 마케팅의 관점에서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혐오 문화를 즐기는 젊은 여성으로부터 지지를 얻은 것에 크게 고무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남성과 여성 모두의 해방적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옹호한 벨 훅스 부류의 입장에서 이것은 명백한 ‘재앙’이다. 더군다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다수의 젊은 여성조차 페미니즘이 남성의 해방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해방적 이데올로기(벨 훅스)”에 냉소를 표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오늘날 젊은 여성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형태로 수용된 페미니즘이란 ‘한남(한국남성)을 패는 것이야말로 여성인권 향상의 지름길’이며 이에 반해 이들을 충분히 패지 못하는 온건 페미니즘은 ‘스까페미’7라는 비난을 받는다. 이러한 관행이 메갈리아가 남긴 대표적인 유산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 상당수의 진보인사와 페미니스트들은 일베의 혐오발언을 미러링했다고 자처한8 메갈리아를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으로 상찬한 바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열거해 보자. 메갈리아 논란이 한창이던 당시 여성학자 정희진은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라는 평가를 남긴 바 있다.9 이와 유사하게 문학잡지 『릿터』에 기고한 김현미 교수는 “메갈리아는 일베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메갈리아 유저들은 상대적으로 만만한 남성 커뮤니티 유저를 향해 무차별적인 혐오를 난사했을 뿐 정작 일베 및 디시인사이드 내 일베성향 커뮤니티를 상대로 전면적인 논쟁을 벌인 일은 전무하다. 또한 정희진 자신은 다른 곳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라고 자인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발언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있다. 게다가 메갈리아 한참 이전에도 일베에 조직적으로 저항한 커뮤니티들(이른바 남녀 커뮤니티가 연합해서 일베 게시판을 테러한 바 있는 2012년의 ‘일베대첩’ 등)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두 논자의 논평은 사실과 어긋난다.10 이 외에도 이나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메갈리아를 보세요. 여성 스스로 온라인 공간에서 다층적인 문제를 나누면서 일상적인 지식 토대를 마련했어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구나, 날 지지해주는 이들이 있구나’하면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거죠. 여성들이 ‘제도화된 부정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대안적-하위 공론장을 구성하고, 당연하게 느낀 기존 개념들을 반성하고 새로운 프레임을 주도해 나가고 있습니다.”11

긍정적인 ‘정치적 주체화’와 ‘연대’의 경험을 창출했다는 관점에서 메갈리아를 옹호한 또 다른 논자는 윤지영이다. 그는 《철학저널》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에서 (다소 현학적이긴 하지만) 메갈리아에 대한 긍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부여한 바 있다.

“여성들은 피해자적 서사에 갇히지 않고 이러한 공포감정이 남성중심의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폭로하며 분노하고 저항하고 있다. 폭력으로조차 인식되지 못한 특권적 힘의 배분구조를 뒤흔들며 새로운 일상과 새로운 관계양식을 모색하기 위한 행위자로서의 주체화 과정을 실행해내는 여성들은 피해자적 이분구조에 갇힌 것이 아니다.”12

물론 문화평론에 기반한 여성주의 논문들이 으레 그렇듯 저자들은 현학적인 논의로만 일관할 뿐 메갈리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정치적 주체성과 연대의식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실례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일련의 옹호론 이후 실제 커뮤니티가 어떻게 분화되었고 그것이 어떤 대중적 파장을 가져왔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미리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메갈리아에서 벌어진 혐오발언의 폭주는 남녀대결 프레임을 고착시키고 광범위한 도덕적·지적 퇴행현상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진보운동과 담론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잘 알려져 있듯 메갈리아는 2015년 12월경 남성 게이에 대한 ‘똥꼬충’ 등의 혐오발언을 용인할 것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메갈리아’와 ‘워마드’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분열 이후 대부분의 활동회원이 남성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긍정하는 워마드로 옮겨갔으며 기존 메갈리아 운영진 중 일부가 이중계정으로 워마드로의 이주를 독려하는 등13 메갈리아는 사실상 워마드로 계승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워마드가 개설된 직후 메갈리아는 운영중지 상태에 빠지고 결국 폐쇄에 이르렀다. 이후 워마드 내부의 혐오발언은 가일층 격화되어 현실의 범죄로 이어졌다. 워마드 회원으로 알려진 유투브 스트리머 ‘호주국자(닉네임)’가 남아 대상의 성희롱적 언행을 개인방송에서 일삼다가 호주 현지에서 아동 착취물 유포 혐의로 기소됐는가 하면, 급기야 올해 5월에는 한 워마드 회원이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에서 남성모델의 나체 몰카를 워마드에 유출하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사건의 큰 파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워마드 회원들은 태연하게 몰카 피해자의 촬영장면을 크로키로 묘사한 그림을 게재하고 피해자를 조롱하는 등 2차 가해를 저질렀다. 이쯤 되자 여성주의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한겨레 신문 지면상에서 “워마드는 페미니즘이 아니다”는 공식적인 파문결정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14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는 동안 메갈리아의 혐오발언을 ‘결사옹위’한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그 동안 일베 등 혐오집단의 심각성을 언급하는 측에서 자주 인용했던 ‘혐오의 피라미드’ 이론에 따르면 일상의 혐오발언의 누적은 궁극적으로 혐오범죄로 이어질 것이라 예측된다. 그럼에도 유독 메갈리아만큼은 이 예측에서 예외가 될 것처럼 생각됐다. 현실에서 관찰된 메갈리아가 아닌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 미화된 메갈리아에 대한 옹호론이 난무했던 결과이다. 지금도 워마드 이전의 메갈리아는 순수한 여성운동에 가까웠다는 변호론을 볼 수 있다.15 그러나 워마드가 몰카범죄로 물의를 빚기 한참 이전인 2015년의 시점에서도 실제 남성을 대상으로 촬영된 몰카를 유출하는 행위가 메갈리아 게시판에서 다수 이뤄졌으며 심지어 이러한 행위가 내부 구성원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16 워마드 회원이 저지른 혐오범죄의 시그널은 과거에도 충분히 있었음에도 메갈리아 변호론자들은 그 내부양상을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것이다.

메갈리아를 통해 공고화된 성대결 프레임이 운동과 담론의 수준을 후퇴시킨 것 또한 빼 놓을 수 없다. 워마드 몰카 가해자가 경찰에 붙잡힌 후 일부 인터넷 여초 커뮤니티 회원들을 주축으로 범죄자가 ‘여성이라서 빨리 잡혔다’는 취지로 항의시위(5월 19일 혜화역 시위)를 벌이며 ‘동일범죄 동일수사(처벌)’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성범죄를 비롯한 주요 강력범죄의 수사 및 처벌에서 성별을 근거로 한 차별이 이뤄진다는 주장의 근거가 매우 희박할 뿐만 아니라17 워마드 홍대 몰카 범죄의 경우에도 조기에 범행 장소(대학수업)가 특정되었다는 점이 작용하여 범인이 검거되었을 뿐이다. 사실 세세한 사실관계를 떠나 여기서 제기되어야 할 근본적인 의문은 애초에 왜 남성의 피해가 빠르게(?) 구제받는 것이 공분을 불러일으켜야 하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즘이 몰카범죄를 이슈화한 결과 남성도 구제하는 사례가 나타났다’는 반가운 신호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페미니즘 논자나 운동단체도 사건을 이러한 방식으로 의제화하지 않았다. 남녀대결 프레임에 아부한 결과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자신들의 구호가 공염불이 된 것이다. 또한 앞서 말한 시위현장에서는 몰카 피해자를 공연음란죄로 수사해야 한다는 등의 2차가해 허위주장이 널리 유포되었다. 성대결 프레임이 낳은 도덕적 퇴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단면이다.

IV. 성대결 프레임 속 진보적 상상력의 후퇴

통계청에서 주최한 ‘제2회 통계 바로 쓰기’ 행사의 수상작 면면을 보면 이들 중 상당수가 여성계가 저지른 통계왜곡 및 통계해석 오류를 지적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1등 수상작은 ‘근로자의 남녀보수 차이를 비교할 때 성별뿐만 아니라 노동시간, 근속연수, 연령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함’을 제시한다. 3등 공모작은 언론상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했던 ‘세계 성격차지수(GGI) 보고서의 왜곡 및 확대해석’을 지적했다. ‘강력범죄 피해자의 89%가 여성이라는 통계는 성범죄를 강력범죄에 포함시킨 카테고리 분류의 변화에서 나온 숫자’라는 지적(격려상)도 눈길을 끈다. 여성계의 통계 오남용 관행을 짐작할 수 있는 수상결과이다.

한편 이들이 경제적 통계를 취사선택하는 방식을 통해 또 다른 우려스러운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성대결 프레임이 ‘하층계급의 곤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공통의 집합적 해결책도 가능하다’는 오랜 진보적 상상력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영역에서 흔히 지적되는 남녀격차를 예로 들어 보자. ‘82년생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93.4%지만 여성은 독박육아와 경력단절 탓에 59.8%’라는, 여성의 피해를 강조하는 성별 비교가 흔히 이뤄진다. 하지만 저 93.4%라는 숫자에는 분절된 노동시장 구조 속에서 여성이 독박육아를 하는 동안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독박노동’을 하는 남성도 포함된다.18 또한 OECD 2위라는 살인적인 수준의 노동시간의 폐해는 이들 남성에게 집중되며, 연간 2,000명에 육박하는 산업재해 사망자 대부분(2015년 기준 96%)도 이들 남성이다. 보통의 남성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형적 노동시장 구조를 만들어낸 장본인도 아니며 그 구조 속에서 행복한 이들도 아니지만 남녀 간의 경제적 격차를 거론하는 대중적 담론의 층위에서 그 사실은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현실의 임금격차 및 소득격차는 자본/노동,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의 격차 등 여러 층위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연동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평등을 개선하는 것이 (상당수가 영세기업과 비정규직에 머물러 있는) 여성 전반의 지위상승에 도움이 된다는 자명한 사실은 쉽게 망각된다. 예컨대 진보주의자라면 마땅히 페미니스트를 자처해야 한다는 훈계조의 선언은 넘쳐나지만 그에 비해 페미니스트라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복지국가 강령 및 노동관행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특히 남녀 임금격차 및 고용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시간 당 임금의 상승을 동반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 육아휴직의 확산 등 각종 노동개혁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것이 남녀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할 지점에서 비난을 한 성별에게 전가하는 일부의 관행은 진보가 아닌 퇴행에 불과하다. 다시 “페미니즘의 반란은 성공했지만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벨 훅스의 발언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도 진보가 과거 합의한 가치로부터 후퇴하는 현상이 전면화되고 있다. 대중적 호평을 받으며 흥행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이선균·아이유 출연)에서 일부 폭력적인 씬이 등장하는 것을 빌미로 해당 드라마가 후진적 남성성과 폭력성을 미화한다는 비난이 일부 언론(한겨레 신문과 오마이뉴스)과 평론가(황진미 등)로부터 쏟아진 일이 있었다.19 비록 드라마의 흥행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 지점에서 과거 진보 지식인들이 총기사고를 ‘폭력적 비디오게임’ 탓 등으로 돌린 보수 종교계와 정치인을 비판했던 선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20 대중매체의 방종이 도덕적 타락과 범죄를 조장한다는 관성적 비평에 단호하게 반대했던 과거 포지션으로부터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진보진영이 “해방적 이데올로기”(벨 훅스)를 방기하고 성대결 프레임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닌 결과이다.

V. 결론 및 요약: 지식인의 책임을 묻다

앞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요새 언급되는 백래시는 기본적으로 페미니즘과 진보진영의 실천적·이론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여초 커뮤니티에서 전부터 존재해온 사이버폭력과 혐오문화를 미러링으로 포장해서 옹호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성대결 프레임 확산과 대중운동의 지적·도덕적 퇴행으로 귀결되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성대결 및 남성혐오 확산에 편승해온 노선의 오류를 직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승리주의적 평가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에 집착하는 반지성적 모습을 지식인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가령 메갈리아의 ‘남성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각의 주장을 보자. 이러한 황당한 주장을 지적으로 정당화한 대표적인 사례는 홍성수 교수의 저서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 2018)인데 거기서 홍교수는 혐오발언은 정의상 강자·다수가 소수자·약자에게 행하는 것이므로 여성 측의 남성혐오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져온다.21 이러한 논리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로 유명한 우에노 치즈코가 일찍이 내한강연 당시 펼친 지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혐오발언에 대한 이러한 협소한 정의(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폭력)를 따르더라도 메갈리아 내에서 성소수자(똥꼬충), 어린이(한남유충), 장애인(장애한남, 윽엑), 심지어 같은 여성(흉내자지, 명예자지) 등 소수자·약자를 상대로 한 혐오발언이 난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22 사실 홍성수 교수의 주장은 이미 과거 엘리자베스 바댕테르와 나오미 울프 등의 페미니스트조차 그 허구성을 꼬집은 ‘여성은 폭력성에서 면제된 존재’라는 순진하고 낭만적인 인식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메갈리아를 옹호했던 진영 전체의 오류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동기 역시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여성운동 진영에서 남성(성)에 대한 멸시를 긍정한 결과 그것은 남성 내부의 소수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목적성 자체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벨 훅스도 이와 비슷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수많은 백인 여성해방운동가의 수사법 속에는 페미니즘 운동에서 남성이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페미니즘 운동이 성공하면 남성을 패배자로 만들 것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전투적인 백인 여성들은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를 차지하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노여움, 적개심, 분노로 격앙되어서 페미니즘 운동이 그들의 공격을 위한 공론장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23

지금까지 본 지식인 일부의 곡학아세는 지식인이 보이는 책임방기의 한 가지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실천적·이론적 오류와 그것이 낳는 위험한 반동을 제대로 인식하고 우려하는 이들조차 이러한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 절로 해소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상황이 이전보다 더 악화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는 그러한 자동적인 ‘정화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파행으로 치닫는 성대결 양상과 진보진영 전체의 퇴행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이들이 ‘침묵’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주.
1. 밈(meme): 특정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인터넷의 유행어나 이미지를 일컫는 말

2. EBS 까칠남녀에서의 ‘남자들은 강간을 가르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는 발언과 한겨레 신문 기고글의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는 살덩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 우주로부터 환대받는 존재’라는 표현 그리고 개인 SNS에서 십자가 모양 딜도를 홍보한 것이 논란을 일으켰다.

3. 수전 팔루디, 황성원 역, 『백래시: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아르테, 2017.

4. 한겨레21, <페미니즘, 반격을 맞다>, 2017.12.20.

5. 발터 벤야민. 20세기 초중반 활동한 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철학자이다. 훗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 큰 영감을 준다.

6. 벨 훅스, 윤은진 역,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모티브북, 2010, p. 246.

7. 섞어 먹다의 사투리인 스까 묵다를 차용해 여성 외의 남성의 인권을 챙기는 페미니즘에 대한 조롱 섞인 경멸적 표현이다. 워마드, 트위터, 다음 여초카페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는 인터넷 유행어이다.

8. 그러나 이러한 ‘일베에 대한 미러링 가설’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역사에 대한 무지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메갈리아 류의 남성혐오 발언은 이미 ‘남자연예인갤러리’ 등지에서 일베와 동시기적으로 혐오발언을 즐긴 여성 악플러 집단에서 비롯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혐오의 미러링』(박가분, 바다출판사)의 ‘메르스 신화는 없다’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9.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 한겨레신문, 2016.07.30.

10. 박가분, 바다출판사, 『혐오의 미러링』, 2016, 22p. 참조.

11. <공기 같은 차별·혐오, 남자들이 스스로 성찰하고 바꿔야>, 여성신문, 2016.05.29.

12. 윤지영(2016), 「현실의 운용원리로서의 여성혐오」, 『철학연구』 115호, pp. 206.

13. 박가분, 바다출판사, 『혐오의 미러링』, 2016, 123p. 참조.

14. <홍대 누드모델 사진 유출, 워마드는 페미니즘이 아니다>, 한겨레 신문, 2018.05.08.

15. 필자의 책에 대한 일부 긍정적 언급에도 불구하고 메갈리아 변호론으로 일관한 최미진의 다음 기사를 참조할 것. <포비아 페미니즘, 페미니즘 일각의 문제점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다>, 노동자연대, 2017.12.29.

16. 박가분, 바다출판사, 『혐오의 미러링』, 2016, 109p. 참조.

17. 실제로는 몰카범죄(카메라 이용 촬영죄)의 검거율과 기소율 모두 일반형사 사건에 비해 높다(대검찰청 범죄통계). 아울러 주요 강력범죄 사법처리 현황을 볼 때 법원이 여성에게 양형기준보다 관대한 판결을 내린다는 결과가 나타나 있다(김현석(2010), 「양형기준의 시행성과와 향후 과제」, 『형사정책연구』, 제82호, pp. 7-41).

18. 이선옥, <‘82년생 김지영’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리얼뉴스, 2018.03.31.

19. 황진미, <'나의 아저씨', 기득권 아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 한겨레, 2018.03.24.

20. 미국 내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이 대표적이다.

21. 홍성수에 대한 비판은 <진보적 법학자의 후진적 메갈리아 옹호>, 리얼뉴스, 2018.01.31. 참조.

22. 메갈리아·워마드 내의 소수자·약자를 향한 혐오발언에 대해서는 『혐오의 미러링』 115~127p.의 구체적인 사례 참고할 것.

23. 벨 훅스, 윤은진 역,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모티브북, 2010, 68~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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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 글을 읽고 "남성혐오"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정확하게 "남성 "권력자" 혐오"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그동안 페미니즘을 안이쁜 여성들의 "성 상품화"로, 페미니스트를 일종의 성매매 여성들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성 대결이라고 겉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권력있는 소수 남성과 여성의 야합 vs 권력없는 다수 남성의 대결이지요.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사상을 상품화 하여 권력자 특히 진보층 정치인들한테 팔고, 그걸 구매한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동물적인 본능에 근거한 패륜과 방종을 묵인하는 관계가 되지요.

다만 성매매나 성상품화의 차이점은 "상품의 효용"이 남성의 성욕을 직접 자극하느냐, 간접적으로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느냐의 차이점일 뿐.

그렇기 때문에 남성혐오. 아니 남성"권력자"혐오는 있을 수 없지요. 어느 성매매 여성이 "영업중"(?)에 대놓고 고객 앞에서 고객혐오를 합니까? 동네 구멍가게도 이런 식으로 운영하지 않습니다.




덧글

  • 비블리아 2018/12/30 17:09 #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승부는 났고 페미니즘의 완승으로 끝나가는 거 같습니다.
    장관이나 총리가 대놓고 메갈,워마드를 옹호해줄 정도니까 대세는 정해졌죠.
    대깨문 대깨문 거리더니 진짜로 대가리가 깨져가도 여전히 20대 한남충들은 민주당 편을 들어주니까요.

    "지금 젊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게임하고 축구보느라 여자에게 뒤쳐져서 표하는 불만일 뿐이다" 라는 유시민의 시각은 현재 정권을 잡은 좌파인사들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고 말이죠
  • 흑범 2019/01/07 19:26 #

    그러고보니 지금 20대들이 대부분 86세대들 자식세대 되겠네요
  • 알토리아 2018/12/31 14:36 #

    페미니즘으로 인한 여성과 남성의 대립을 일종의 성전(聖戰)으로 해석하고, 여성들이 남성들을 무찌르고 탄압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퇴행적 진보라고 비판하는 건 오히려 칭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타마 2019/01/02 10:57 #

    후후... 세상에는 똥이 가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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